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사 폭동 (문단 편집) === 폭동의 실패 === 마오쩌둥은 주더와 함께 7월 31일 난창을 공격했지만 방어가 견고했던 난창은 홍군의 공격에 맞서 24시간이나 치열하게 저항했고 도시를 도저히 점령할 수 없어 8월 1일에 공격 중지를 결정하고 퇴각했다. 마오쩌둥은 잔존병력을 3종대로 재편하여 우한을 향해 퇴각, 8월 20일, 홍군 1군단은 문가시에서 국민당 3개 단을 전멸시키고 국민정부군 여단장 대두원(戴斗垣)을 사살했다. 또한 8월 23일 홍군 1군단은 호남성 유양현 영화시에서 창사에 대한 재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펑더화이와 합류했다. 이들의 병력을 합치면 2~3만에 달하는 병력이 있어 한번 해볼만한 것으로 여겨졌다. 홍군 1군단과 3군단은 홍1방면군으로 통합 개편되어 주더가 총사령관, 마오쩌둥이 총전선위원회 서기 겸 총정치위원을 맡았다. 마오쩌둥, 펑더화이, 주더는 8월 31일 창사를 다시 공격하였다. 하지만 창사의 노동자들은 홍군에 냉담하였으며 창사에는 국민혁명군의 중포, 비행기, 해군 함정들이 집결해 있어 고작 반 정도만이 소총으로 무장할 수 있던 홍군의 빈약한 공격을 손쉽게 격퇴했다. 마오쩌둥은 9월 2일 3차 공격에서도 실패하였고 9월 13일까지 2~3천에 달하는 많은 병력을 잃었다. 심지어 주더조차도 부상을 입었다. 마오쩌둥은 창사를 공격하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 호남, 강서의 성경에 따라 길안으로 철수하여 강서 남부의 근거지로 후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마오쩌둥은 원주까지 후퇴, 중공중앙 장강국 군사위원회 책임자 저우이리가 창사를 다시 공격하라는 당중앙의 지령을 전달하자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설득하여 창사나 난창에 대한 공격을 모두 거부하고 공략이 쉬운 강서성의 길안을 공격하기로 당중앙의 승인 없이 결정하였다. 그외에 전국적으로 혁명고조기가 왔다던 리리싼의 판단과 달리 노동자와 농민들은 대부분 공산당의 폭동에 냉담하여 전국적으로 1~2천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호응하였을 뿐이며 만주, 하남, 산서, 섬서, 한동, 호북, 복건, 절강, 광동, 호남 등의 10여개 성위원회 기관이 파괴되고 우한, 난징의 당 조직이 와해되어 중국 공산당의 주장에 따르면 지도자급 위원들을 포함하여 수백명의 당원이 체포, 처형되었다.[* 난징시 위원회와 시행동위원회만 해도 6명의 위원이 체포되었으며 15개 지부가 파괴되고 100명이 체포, 100명이 처형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